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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21년동안 청와대서 다섯 대통령을 모신 장기붕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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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71
등록일
2008-04-22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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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불사조´ 경호원 시절 비화공개

<인터뷰>21년동안 청와대서 다섯 대통령을 모신 장기붕 씨
"경호는 충성이 아니라 아니라 투철한 직업의식으로 하는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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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규하 전 대통령부터 김대중 전 대통령까지 21년동안 청와대에서 대통령 경호를 해 왔던 장기붕 대경대학 경호학과 교수. ⓒ 데일리안 김건표
22년 동안 다섯 명의 대통령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수행 경호한 장기붕 씨(55).

청와대 경호원으로 살아온 지난날의 흔적들은 그를 따라다니는 수식어에 고스란히 묻어있다. 79년 10.26 궁정동 사건 당시 유일하게 생존한 박상범 전 경호실장과 함께 ´청와대 불사조´로 통하기도 했다. 목숨을 내놓고 몸을 던져야 하는 경호의 세계. 그의 첫 마디는 경호원은 정치가 아니라 투철한 직업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를 만났다.

그가 청와대 경호원으로 살아온 세월은 21년. 13년 동안은 1980년 최규하 대통령부터 김대중 대통령까지 우리나라 최고통치권자인 대통령 다섯 명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수행하면서 같이 뛰고, 걷고, 숨을 내 쉬면서 자리를 꼼짝없이 지켜냈다.

경호원으로 살아온 그에게 잊지 못할 꿈틀거리는 기억이 하나 있다.

83년 10월 9일로 돌아간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수행해 미얀마로 날아간다. 아웅산에 도착했을 즈음에 폭발음이 진동을 했다. 건물들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내려 앉았고, 주변은 순식간에 일그러져 알아볼 수 있는 형태는 보이지 않았다. 파편들은 사람의 뼈 속 깊은 곳에 박혀져 집어 삼켰다.

빠른 속도로 치솟아 올라가는 연기는 하늘이 순식간에 집어 삼켰다. 검붉은 연기가 속도를 멈추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의 살아 움직이는 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도 수십 개의 파편조각들이 몸 속으로 날아들었지만 방탄복 덕분에 간신히 살아난다.

바로 주변을 살폈다. 그는, 거친 숨을 내쉬고 흘러내리는 붉은 피들을 쏟아 내면서 부상자들을 후송하고 시신을 수습한다. 이때가 그가 경호업무를 시작한지 4년 해를 넘기는 시기였다고 한다.

아웅산 폭파현장에서 투철한 모습을 보였던 그는, 경호원으로서 더 유명해졌고 유명세를 탔다. 평생 잊지 못할 이 사건으로 평생 경호원으로 살아가겠다며 마음 깊은 곳에 그 다짐을 꼭꼭 숨겨 놨다. 21년 동안 그걸 지켜냈다. 그와 얘기를 나누기 전에 서로 냉수 한잔을 마셨다. 청와대 경호원으로 살아온 그의 22년의 세월이 궁금해졌다.

그는 기억을 다시 꺼내놔야 하고, 듣는 사람은 그 현장에 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긴장을 풀었다. 말을 꺼내면서 눈이 커지고 표정은 없다. 그가 경호원으로 살아온 세월을 쏟아내기 시작 한다.

“목숨을 건 경호였어요.” 다시 표정이 바뀌어 진다. 그는 아직도 그 현장에 그대로 있다. “이 사건으로 경호원이 천직이라고 생각을 하게 됐어요. 경호원으로서 마음이 더 단단해진 겁니다.”

그가 경호원으로 살아온 22년 세월에는 말 못할 사연도 있고 지워지지 못하는 기억들도 많다.

그를 감싸고 있는 주변 벽에는 그가 모셨던 대통령들과 찍은 사진들이 액자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미 백악관 경호실로부터 받은 표창장에는 그가 경호원으로서 살아온 삶이 녹아내린다.

그가 청와대 경호원으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79년 10.26 궁정동 사건이 터지고 나서인 시기와 관련 있다.

“전역을 앞둔 시점이었어요. 그런데 10.26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청와대의 공백이 컸다고 들었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경호실 조직에 대한 책임 문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경호실은 18년 동안 거목을 경호하면서 당시 경호원들이 정치적인 월권개입도 많았어요. 이 사건을 계기로 70% 이상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청와대 경호실을 떠났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청와대 경호실에 대대적인 정화작업이 시작됐다고 말한다.

“대통령 신변보호만 하는 게 경호실이 아닙니다. 통치권자의 청와대 안전, 보안, 통화를 할 때 스파이 보호를 막아야 하는 당위성들이 있습니다.”

그는 10.26 사건을 계기로 최규하 전 대통령이 최고 통치권자가 되면서 청와대 경호실의 제 역할들이 바뀌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청와대 경호원들을 지칭하던 ‘경호요원’이라는 고유명사가 사라지고 대신 ‘충무요원’으로 이름이 변해 청와대 경호실도 새로운 변화와 새 옷을 갈아입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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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붕 교수가 미 백악관 경호실로 부터 받은 표창장은 그가 경호원으로 살아온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 데일리안 김건표

충무요원 5기로 청와대 경호원으로 들어간 그는 공과대학 출신으로 경호원이 되기 전까지 그의 꿈은 엔지니어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군에 있을 무렵, 부대지휘관의 추천으로 그의 인생도 180도 달라지게 된다.

“공과대학을 나와서 화장품 회사에 취업이 됐어요. 근무를 기다리다가 충무요원 시험을 봤습니다. 합격을 한 거예요. 화장품 회사를 다닐까 경호원이 될까 하는 생각에 마지막 날까지 결정을 못 내렸습니다.”

그가 경호원이 된 것도 우연에 가깝지만, 합격한 두 직업 중 경호원을 선택하게 된 것도 친구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미아리가 집이었어요. 버스를 타고 40분을 달려야 청와대에 내릴 수 있어요. 화장품회사로 가는 차로 갈아타야 하는데 동기 한명이 청와대 앞에서 왜 안 내리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말에 그냥 차에서 내렸어요. 그래서 청와대 경호원으로 결정된 겁니다.”

이때가 광주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80년 5월이었다고 회상한다. 그의 시선이 창문 쪽 외경으로 향한다.

경호원으로 살아왔던 지난날들이 빠른 속도로 스쳐가는 듯 표정이 바뀌고 말의 속도도 변화된다. 경호원이 되고 나서도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고 털어 놓는다.

“제 스스로 경호원이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나 봐요.” 경호원으로 천부적인 감각을 지닌 그가 털어놓는 고백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경호원 그러면 남자들의 세계가 연상되잖아요. 그러한 환경과 분위기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의외로 자유분방한 성격이거든요.” 그의 이 한마디는 경호실 분위기를 짐작하고 남게 만든다.

그는 경호원이 안전해야 대통령도 안전할 수 있다고 말한다.

“10.26 사건 때 경호원 6명이 목숨을 잃었잖아요. 다들 방탄복을 착용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는 방탄복 착용이 개인 목숨을 지키자고 말하는 게 아니라 경호원으로서 투철한 직업의식이자 윤리적 문제라고 말한다.

“경호원들의 사생관, 위기극복요령, 사소한 것들이 다 중요합니다. 제 목숨을 지키기 보다는 남의 목숨을 지켜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박상범 경호 실장은 방탄복을 입지 않으면 근무를 안 시켰습니다. 그분도 오랜 경험을 통해서 몸에 깊숙이 배어 있었던 겁니다.”

13년 동안 가까운 거리에서 대통령 수행경호를 하면서 특별한 기억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이 한마디의 질문에 컴퓨터 앞에 놓여있는 마우스를 잡고는 숨을 돌린다.
두 팔을 가슴 깊숙이 찔러 넣고는 천천히 말을 이어간다.

“제가 김대중 대통령 시절 당시 경호실장과 언쟁을 한 적이 있어요. 충성을 진실로 하라는 거였습니다.” 그의 표정과 눈빛이 살아 움직인다. 감정이 잦은 숨소리를 내면서 달라지고 또 바뀌어 진다. “그런데요. 경호는 충성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그의 이 한마디에 그를 올려다봤다. 경호원이 충성으로 보좌하고 경호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된단 말인가. 요즘 뉴스로 자주 등장하고 있는 코드인사문제를 예를 들어 말을 꺼낸다.

“대통령과 정책적으로 움직이는 분들의 코드인사가 문제가 됐지만 난 당연하다고 봐요. 정책적 보좌, 정책적인 코드가 맞지 않으면 힘들어 질 수 있어요. 방향을 같이 해야 되는 거죠. 경호원은 코드가 같거나 다른 것이 아니라 경호원으로서 투철한 직업의식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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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호는 정치가 아니다”라고 장 교수는 주장했다. ⓒ 데일리안 김건표
그가 10.26 궁정동 사건 얘기를 꺼내면서 경호원의 직업의식에 대해서 말을 이어간다.

“당시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말단 경호원들은 총을 들고 저항했어요. 당시 상황에 있어 차지철은 몸을 숨기려고 했잖아요. 말단 경호원들은 목숨을 걸었어요. 경호원들의 철학과 직업의식은 정치성이 아닙니다. 정치적으로 같이하라는 것은 웃기는 얘깁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경호원들만큼은 낙하산 인사가 있으면 안 되는 겁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경호원 인사는 낙하산이 없었어요.”

그가 양복 상의를 벗는다.

“김영삼 전 대통령 페인트 투척 사건이 있었잖아요. 경호원 생활을 안해 본 사람이 책임자였어요. 투철한 직업의식이 없었던 거라고 생각해요.”

그는 경호원은 이기고 지는 승부의 싸움이 아니라고 말을 한다.

“성공을 했는지 안했는지의 싸움인 거죠. 경호성공을 위해서는 이기면 됩니다. 늘 긴장한 채 누군지 모르는, 보이지 않는 적하고 싸우는 겁니다.”

목숨을 내던지는 경호업무에 있어 충성심은 투철한 직업의식에서 형성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누가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경호원으로서 충성심은 직업의식, 사생관, 훈련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경호원은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게 다릅니다. 총, 칼을 꺼내서 피하면 본능이지만 우리는 흉기를 보면 공격해야 해요. 다른 거죠. 경호원들은 사격선, 공격선들이 눈에 훤하게 들어옵니다. 상대방의 공격선이 눈에 들어오면서부터 희생을 전제로 경호를 해야 합니다.”

무도가 몸 깊숙하게 익혀져 있는 것이 경호에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는지를 물었다. 그와 대화를 나누기 전까지는 무도유단은 경호원의 필수 조건이라고 생각했었다. 그의 대답은 생각을 비켜간다.

“무도가 경호 수단으로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좋은 경호원이 되는 것에 있어서 필수는 아닙니다. 경호업무의 모든 동선을 감각적으로 느끼고 대처할 수 있는 순발력과 두뇌 판단이 제일 중요해요. 경호원은 머리가 좋아야 한다는 얘기지요. 무도를 배우지 않았어도 급박한 상황에 몸만 들이밀어도 경호는 절반이 성공한 거예요. 경호의 동물적인 감각은 따로 있어요.”

그는 덧붙여 “1차적으로는 경호원으로서 정신세계, 신체조건이 더 중요해요. 운동은 꾸준히 해야겠죠. 2차적인 문제입니다. 무도훈련은 경호원이 된 후에도 할 수 있습니다. 공채부터는 무도 특기자를 선발하지 않았어요. 경호원에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투철한 직업의식관인 겁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수행하던 경호시절이 가장 깊숙하게 기억에 남는다고 말한다.

그의 첫마디는 “현장을 확인하는 분이었어요.”였다.

역대 대통령으로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듣는 것이 새롭다. 그가 냉장고를 열고는 음료수를 내놓는다. 한 손으로 병을 잡고는 그를 쳐다봤다.

“민정시찰을 많이 했어요. 잠행을 좋아했죠. 현장으로 달려가서 직접 문제점을 보고 판단했어요. 새벽에 밖으로 나가서 서민들의 애로사항을 듣는 거죠. 정말 개인적으로는 힘들었지만 그런 방면에서는 상당히 존경스러웠어요. 군인으로서 몸에 밴 습관들이 대통령이 돼서도 그대로였으니까요.”

그의 다음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교도행정을 직접 보기 위해 교도소까지 직접 간 거죠. 구석구석 돌아보는 문제점이 없는지를 판단하더라구요. 경호원들은 늘 긴장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죠. 언제 어디로 민정 시찰을 나갈지 모르기 때문이죠.”

그가 내뱉는 말은 확신에 차고 믿음이 깊어 보인다. 그는 리더십 측면에서 대형 사고를 막아내는 것은 현장상황을 최고통치권자로서 무엇보다도 체감하고 있어야 빗겨갈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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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 경찰제로는 사회감시시스템이 어렵다며 자치경찰제를 주장하는 장 교수. ⓒ 데일리안 김건표
“태안기름 유출 사고도 관심을 가졌다면 막을 수 있는 부분이었어요. 대구지하철 사고도 그래요. 시민들의 안전이 중요한 건지를 판단했어야 해요. 불 잘 타는 자재를 썼잖아요. 그러니까 시민들이 안전 불감증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공공에서 그러한 판단을 하니까 공공의 적이 되는 거죠.”

그가 답답한지 창문을 시원하게 열었다. 안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달라진다. 두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마음도 밖의 자연을 닮아간다.

어린이 유괴사건에 대해서 사회적 관심도 크다. 21년 동안 경호원으로서 가장 중심에 서서 살아온 그의 생각은 이렇다.

“어린이 보호에 대한 제대로 된 감시시스템이 없어요. 국가 경찰체제로는 사회감시시스템 구축이 어렵다고 생각해요.”

그도 어린이 유괴 사건이 만연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아쉬움도 많다. 그도 부모마음이다.

“경찰들은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죽은 것으로 끝납니다. 미국처럼 자치경찰을 선별해서 운영하는 시스템이 없는 게 아쉽습니다. 죽은 그 다음이 더 중요한 겁니다. 다음에 그러한 동일 사건이 일어나면 더 문제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들은 머리를 싸매고 연구를 합니다. 신호체계, 지리적 조건 등 모든 문제점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연구를 하고 지방의회에 가서 설명을 해야 해요. 문제점과 대책을 마련하는 거죠. 그래야 예방이 가능하다는 거죠.”

그의 말이 이어졌다.

“어린이 유괴도 그렇습니다. 예방적 측면에서 24시간 초소를 운영해야 합니다. 꺼지지 않는 감시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어야 한다는 얘깁니다. 문제가 있기 전에 예방하는 차원에서 초소운영을 더욱 광역화 시켜야 해요. 초등학교 앞에는 의무적으로 불이 꺼지지 않도록 경찰이 상주하는 초소 운영 등을 자치경찰을 중심으로 의무적으로 제도화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책적으로 공론화 돼야 시민들은 안전 불감증에서 그나마 회복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호가 필요 없는 세상이 올 것인지 궁금했다.

“경호가 없으면 범죄가 없어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끝없는 욕심에서는 범죄적 욕구는 늘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미국경호제도는 200~300년 동안 발달되어 있어요. 민간경호에서 발전이 되어 왔습니다. 1901년부터 대통령 경호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미국 대통령 암살 사건에는 전문 경호원이 없었어요.”

우리나라 민간 경호도 다양화 되고 있는 추세라고 말하면서 그는 민간 VIP들이 많아지고 반 공공성이 있는 분들의 사회적 활동과 영향력이 커지고 있기 때문에 경호도 더욱 전문화 돼야 한다고 말을 한다.

2006년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발생한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한 테러 사건도 전문경호원이 현장에 없었기 때문에 발생된 것인 만큼, 경호시스템을 강화시킬 필요성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 사례를 들면서 경호업무의 전문용어인 ‘촉수 거리의 유지의 원칙’을 예로 들면서 말을 이어간다.

“경호는 오픈된 상태에서 손을 뻗어서 닿을 수 있는 거리에 피경호인을 두어야 합니다. 지난번 김영삼 전 대통령의 페인트 사건과 박근혜 전 대표의 테러사건도 이 원칙이 빗겨가서 발생된 거라고 생각합니다. 경호에 원칙이 없다는 겁니다. 경호는 지휘권 단일화의 원칙이 매우 중요해요.”

“직위가 높다는 것만으로 경호원이 피경호인과 큰 거리를 두고 경호를 한다면 문제가 발생될 수 있다는 거죠. 이것은 지휘권의 간섭이 아니라 경호는 단일화의 원칙을 지켜야 테러나 예측하기 힘든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겁니다.”

“경호는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것만큼 경호 조치를 할 수 밖에 없어요.”

그는 매킨리 대통령과, 존 에프 케네디 암살 사건에 대해서도 지휘권 간섭에서 비롯된 문제점 이라고 지적한다.

“촉수거리 원칙을 지키는 게 중요합니다. 근접경호는 부담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방어를 위한 겁니다. 이 원칙을 무시하면 방어효과를 상실하게 되고 예기치 못한 사고는 언제든지 발생될 수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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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교수는 “강의를 들은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서 파수꾼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 데일리안 김건표
그는 경호원으로서 사회 현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얘기한다.

“경호업무는 상당히 다양합니다. 군사, 행정, 사회, 문화 등 사회 여러 분야에 걸쳐서 반 전문가가 되어야 해요. 한마디로 무식한 사람은 경호원이 될 자격이 근본적으로 없는 사람입니다.”

그가 경호원으로 청와대를 나오고 나서 대학으로 돌아왔다.

경호원이 되려는 전공자 학생들을 대상으로 경호현장이 아니라 교육현장에서 경호교육을 하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경호원으로 살아온 그의 인생스토리는 든든하고 살아있는 경험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경호업무에 있어 이론체계를 제시한 논문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 됐다. 그는 지금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도 경호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경호원을 가르치는 사람도 경호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평생경호원이 되기 위해서는 좋은 체력을 유지해야 합니다. 아직도 새벽 5시30분이면 일어나서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의 아들도 경호원이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고 얘기를 꺼낸다.

“미국에는 3대가 경호원 출신 집안이 있어요. 의식을 같이하고 있는 거죠. 우리나라에는 아직 대를 물려서 하는 경우는 없는데 미국 유학중인 아들이 경호원이 되고 싶다는 얘기를 합니다. 제가 경호원이었다고 누구한테 말을 잘 안 합니다. 아들이 제 마음을 닮고 싶다고 하니까 반갑죠.”

“앞으로 제 체험을 바탕으로 한 강의를 들은 학생들이 사회의 파수꾼으로 성장하길 바랄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혼을 싣고 강의를 해야죠.”

경호원으로 살아온 지난날에는 기억되는 일들도 많고 가슴에 묻어 넣어야 할 기억도 많다. 평생 경호원으로 살아가겠다는 그의 말 한마디는 지난 21년의 세월을 다시 돌려놓고는 달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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