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영화방송학부 김광보교수 [조선일보]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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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일
- 2005-02-04 18:34
[화요
연재] 스승 임영웅 연극 연출가, 제자 김광보 연출가 정리=김광보·연출가
임영웅(林英雄·71)과 김광보(金洸甫·41)는 극장에서 맺어진 사제지간이다. 부산에서
고등학교 3학년 때 우연히 부조리극 ‘대머리 여가수’를 보고 연출가가 되기로 결심한 김광보는 연희단거리패를 거쳐 93년 신촌
산울림소극장에 조명 기사로 들어가서 임영웅을 만났다. 1969년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국내 초연한 임영웅은 사실주의
극에만 머물지 않고 다양한 작업을 해온 연출가. 김광보에겐 임영웅의 작품이 교실이자 스승이었다. 임영웅도 90년대 초반부터 대학로에서
왕성한 작업을 한 김광보를 눈여겨보았다. 임영웅은 1985년 서울 신촌 자신의 집을 헐고 산울림소극장을 지은 뒤 이곳을 베이스캠프로
‘위기의 여자’ ‘딸에게 보내는 편지’ 등 ‘산울림표 연극’을 만들었다. 김광보는 1994년 연극 ‘지상으로부터의 20미터’로
데뷔한 뒤 ‘인류 최초의 키스’ ‘웃어라 무덤아’ 등을 내놨다.
밈영웅 연출가 “스스로 틀에 가두면 연극도 세상도 자유롭지 못해요” 김광보 연출가 “우리 연극계는 연출가의 성향을 쉽게 단정해요”
▲임영웅=허, 그래? 난 기억이 없어. 지나가면 그만이야. 원래 화 잘 내긴 해도 다 일 때문에 그런 거지 사람 때문은
아냐. 늘 악쓰면서 연극을 해왔는데 그걸 일일이 다 기억하면 병나지. ▲김=연극계도 그렇지만 극장 밖 세상도 요즘 ‘위기’라는 말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이 위기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임=IMF때도 그런 얘기 많이 했지. IMF 때문에 경제가 불황이고 사회가 뒤숭숭하니까 연극도 안 되는 거 아니냐고.
그런데 연극하면서 IMF 아닐 때가 언제 있었나? 한국에서 연극은 독립운동한다는 각오 없이는 안돼요. ▲김=그래도 한국 연극이 활발하고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오던 시기가 있지 않습니까. ▲임=내 경험으론 6·25 전쟁 중 피난갔을 때, 그러니까 50년대가 그랬어요. 아이러니지. 피난 시절에 연극이 가장 역동적이었으니.
▲김=흥미로운 말씀이네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서 연극이 꽃을 피우다니. 몸도 마음도 가난해진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해소할
만한 게 필요했을 테고, 그때 연극이 순기능을 한 것이군요. ▲임=그렇다고 봐야겠지요. 그래도 그땐 전쟁으로 폐허가 됐어도 연극을 볼 정도로 정서의 값어치를 아는 사회였어요. 지금
세상은 갈수록 모래알처럼 까칠해지는 것 같아. 교육부터 문젭니다. 시험에도 안 나오고 점수 올리는 데 바로 도움 안 되는
정서에 왜 신경을 쓰냐는 식이지.
답 객석 채우려면 먼저 감동주는 작품 만들어야지 ▲김=타의에 의해서라도 연극 보러오는 아이들이 자발적인 관객으로 성장하려면 어떤 연극을 해야 할까요. ▲임=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설 때 ‘오늘 연극 보길 잘했다’는 생각을 갖게 해야합니다. 다음에 연극을 다시 봐야겠다는 동기를
심어주는 거, 그만한 연극 만들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김=동기 부여만 된다면 어떤 연극을 해도 상관없다는 말씀이신지요. ▲임=그렇진 않아요. 연극을 통해서 스스로 무대 위에 비춰진 인간들과 자기 삶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작품이 되어야지요.
연극에 비춰보고 ‘나는 지금 어디쯤에 서 있나’ 점검하면서 말이죠. ▲김=선생님은 연극하는 사람들의 의식에 대해 강조해 오셨습니다. 우리가 진정 걱정해야 하는 건 관객의 수가 아니고 우리가
만드는 연극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지금 대학로 연극은 다분히 관객의 취향에 영합하는 포퓰리즘으로 가고 있는 듯합니다. 창작자들은
불안해합니다. 이런 풍토에서 어떤 생각으로 연극을 해야 할까요. ▲임=‘관객의 수가 아니라 연극의 질이 문제’라고 말한 걸 오해하면 안됩니다. 관객의 수도 중요하지요. 다만 객석을 채우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건 관객의 구미에 영합하는 게 아니라 관객을 잡아당길 만한 감동적인 연극을 만드는 일이라는 겁니다.
주객이 전도되면 문제예요. 어려울 때일수록 ‘왜 연극을 시작했는가, 무엇 때문에 하고 있는가’를 확실히 다지고 반성할 건
반성하면서 지켜나가야지요.
답 완성된 연출은 없어… 끊임없이 진실에 접근해야 ▲김=산울림 소극장에서 연극을 일군 지 올해로 만 20년이 됐습니다. 그동안 극장을 지켜야 하는 고달픔과 자존 사이에서
힘들지는 않으셨는지요. ▲임=고단하지. 산울림은 어느 정도 고정관객이 있다 치더라도, 소극장이라는 게 경영의 측면으로 보면 바람직한 공간이 결코
아니니까요. ▲김=키워서 부를 늘리는 자본 논리로 보면 그렇겠네요. 연극은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이미 사양산업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꼬박 20년을 버티지 않으셨습니까. ▲임=1985년 산울림 개관하면서 나한테 다짐했던 게 있어요. ‘한 10년 만 버텨보자. 그러면 뭔가 될 거다’라고 믿었어요.
20년 지난 지금도 상황은 그때 개관할 때하고 똑같아요. 그럼 그만둘까? 나 개인이나 산울림만의 문제가 아니라 연극계 전체에
패배감을 줄 수 있어 그러지도 못합니다. 앞으로 더 잘 해야죠. ▲김=저는 요즘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한국연극계는 연출가의 성향을 하나로 단정 짓기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다양성을
고루 보아주려는 노력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임=연출가를 미술이나 문학처럼 무슨 파(派)나 주의로 구분하는 건 아주 구식이예요. 분류할 수 없는 것을 나누는 것처럼
우매한 일이 없지. 연출가의 연출 방식을 좌우하는 건 그의 성향이 아니라 작품입니다. 날더러 ‘리얼리즘 연극의 마지막 교두보’라고
하는데 물론 내가 리얼리즘을 기본으로 연출 공부를 했고 또 그렇게 작업해 왔지만 모든 연극을 다 리얼리즘으로 연출하냐 하면
그건 아니라는 겁니다.. 스스로를 어떤 틀에 가둔다면 연극도 세상도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김=저는 우리 연극에 없는 게 400~500석 규모의 중극장용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소극장에선 잘 만들어도 중극장으로
옮기면 헝클어지고 고전하는 이유죠. 최근 중극장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건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봅니다. ▲임=그나마 소극장이라도 있어서 한국연극의 명맥이 이어져 왔어요. 하지만 소극장의 역기능이라고 할까, 소극장에서만 아옹다옹
연극과 씨름하다보니 사고도 왜소해지고, 그래서 문자 그대로 ‘작은 연극’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이 듭니다.
중극장에서 좋은 작품이 많이 태어나고 자연스레 스케일도 커지면 우리 연극이 좋은 방향으로 가겠지요. ▲김=저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1990년에야 봤습니다. 그때 받은 충격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역설과
페이소스, 그리고 선생님만의 독특한 연극적 양식은 제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임=처음 ‘고도…’를 하기로 마음먹고 집에 와서 읽는데 보통 두 시간에 끝날 일이 꼬박 사흘 걸렸어요. 원전대로 하겠다는
원칙을 정해놓고 나름대로 해석을 얹은 거야. ‘고도…’는 인간을, 특히 현대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잘 그렸어요. 그러니까
이건 부조리극이라든지 전위극이라든지 그런 건 생각할 필요가 없고,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어떻게 인생을 살아왔는지,
또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그리는 작품인 거죠. 어떤 날은 오전 11시부터 이튿날 새벽 7시까지 연습을 했죠. 참 신기한 게,
할 때마다 새로운 걸 하나씩 발견하게 돼요. 늘 긴장되고. ▲김=몇 시대에 걸쳐 계속 회자될 수 있다는 건 ‘고도…’가 공시성과 통시성을 함께 지닌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건
그 시대와 소통 할 수 있다는 게 이 작품의 매력이지요. 마지막으로 연극과 관객 사이에서 어떤 연출가가 돼야 할지 일러주십시오. ▲임=진실하게 대하는 길밖에 없지 않나요. 술수로 접근해가지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어요. 완성된 연출은 없어요.
숨이 멈출 때까지 도전하고 방황하며 찾아갈 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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